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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는 이유 — 삶이 그냥 흘러만 갈 거 같아서

2026년 8월 28일 · 맨정신

얼마 전에 "이번 달 어땠어?"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뭐, 특별한 일 없었는데"라고 대답하고 나서, 좀 이상했어요.
정말 한 달 동안 하루도 특별한 날이 없었을까.

1. 필요한 건 곧잘 외우는데, 제 삶은 기억을 못 했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닙니다. 필요하면 곧잘 외우거든요.
근데 이상하게 정작 중요한 제 삶은 잘 기억을 못 하더라고요.

작년에 정말 좋았던 날, 혹은 최악이었던 날 하나를 떠올려보면 — 그날의 기분까지 생생하게 나는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2. 친구와 같은 날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친구랑 같은 일을 겪은 적이 있는데, 얼마 전에 그때 얘기를 같이 해봤습니다.
해석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제가 아예 왜곡해서 기억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경험이 세상에서 제일 값진 거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변형되고 휘발되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3. 힘든 날에만 썼고, 어떤 날은 두 줄만 썼습니다

그래서 일기를 조금씩 써왔는데, 쓰다 보니 주로 기분이 안 좋은 날에 쓰게 되더라고요.
어떤 날은 미친 듯이 쓰고, 어떤 날은 너무 힘들어서 "아 너무 힘들다, 쓸 힘조차 없다" 딱 두 줄 적고 잤습니다.

4. 마법은 쓸 때가 아니라 다시 읽을 때 일어났습니다

근데 그 두 줄이, 나중에 보니까 그날을 통째로 데려오더라고요.
"맞다, 나 이날 이것 때문에 별로였지." 안 적었으면 그냥 흘러간 날이었을 겁니다.

더 웃긴 건, 그날 잠까지 설치게 한 그 문제가 지금 보니 진짜 별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때 알았습니다. 일기의 마법은 쓸 때가 아니라 다시 읽을 때 일어나더라고요.

5. 일기는 나에 대한 존중이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이 한 말은 어떻게든 기억하려고 하잖아요. 메모하고, 곱씹고.
근데 정작 나한테는 그렇게 안 하더라고요. 오늘의 내가 보고 느끼고 배운 것 — 나조차 안 적어주면, 세상에 그 하루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는 거였습니다.

일기를 쓴다는 건 오늘의 나한테 "너 오늘 살았어. 내가 봤어. 여기 적어둘게" 하고 말해주는 일이더라고요.

6. 그런데 자꾸 흩어져서 못 썼습니다

이렇게 좋다고 해놓고 저도 썼다 안 썼다 했는데, 이유를 보니 쓰는 곳이 자꾸 바뀌더라고요.
어떤 날은 노트에, 어떤 날은 아이폰 메모장에, 어떤 날은 카톡 나에게 보내기에.

기록이 다 흩어져 있으니까, 다시 읽는 마법이 일어날 자리가 없었던 겁니다.

7. 그래서 배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쓰기 편하고, 다시 볼 수 있고, 게임처럼 누적되는 다이어리가 필요했는데 전 세계를 뒤져봐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만들었습니다.

아르카라는 다이어리인데, 라틴어로 '방주'라는 뜻입니다.
홍수가 나도 지켜야 할 것들을 태우는 배요. 저한테는 제 경험이 그거였습니다.

사소한 건 메모처럼, 기억에 남는 날은 지도처럼 적어두고 — 가끔 지도 아래로 내려가면서 "이때 참 힘들었는데, 그걸 계기로 많이 배웠구나" 합니다.
그러다 보면 지금 고민도 나중엔 별거 아니겠구나 싶어지고요.


일기를 써도 제 기억력은 그대로입니다. 이번 달 어땠냐고 물으면 여전히 바로 대답은 못 할 거예요.
근데 이제 그 대답이 기억이 아니라 배에 실려 있습니다. 변형되지 않고, 그날 그대로.

오늘도 두 줄 실었습니다.